
[시사투데이 윤용 기자] 박근혜정부가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소녀상 이전 등에 관한 일본측 요구 일부를 수용하는 비공개(이면) 합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27일 외교부 장관 직속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이하 TF)'는 31쪽 분량의 검토 보고서를 발표하며 "위안부 합의에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 발표 내용 이외에 비공개 부분이 있었다"고 밝히며 보고서에 따르면 비공개 부분을 별도로 만드는 것은 일본 쪽 희망에 따라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표를 맡은 고위급 협의에서 결정됐다. 비공개 내용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피해자 관련 설득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 문제 △제3국 기림비 지원 문제 △성노예 용어 사용 문제 등이다.
이에 한국 측은 "관련 단체 등의 이견 표명이 있을 경우 한국 정부는 설득을 위해 노력함", "(소녀상 이전 문제는)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 "(제3국 기림비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지원함이 없이 한일 관계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함", '성노예' 표현 사용 중단 요구에 관해서는 "공식 명칭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일 뿐"이라고 답변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보고서는 합의문에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표현이 포함된 것에 대해선 "2015년 4월 제4차 고위급 협의에서 한국 쪽은 '사죄'의 불가역성을 강조했는데, 당초 취지와 달리 합의에선 '해결'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맥락이 바뀌었다"며 "(당시) 외교부는 잠정 합의 직후 국내 반발을 예상해 '삭제가 필요하다'는 검토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지만, 청와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특히 "돈의 액수(일본의 피해자 지원 재단 출연금 10억 엔)에 관해서도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며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박 전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 타결을 서두른 것과 관련해서는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정부의 압박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한·일 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외교 환경 아래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보고서 발표에 앞서 모두 발언을 통해 "위안부 문제는 전시 여성 성폭력에 관한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서 위안부 합의는 여타 외교사항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면서 "특히 당사자인 피해자들께서 생존해 계신 만큼 피해자 중심 접근을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TF 결과 보고서를 토대로 '피해자 중심 접근'에 충실하게 피해자 관련 단체 및 전문가 의견을 겸허히 수렴해 나가고자 한다"며 "아울러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도 감안하면서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정부 입장을 신중히 수립해 나가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또 "비공개 부분에서 한국 쪽의 소녀상 관련 발언은 공개 부분의 맥락과는 달리 '소녀상을 어떻게 이전할 것인지, 구체적인 한국 정부의 계획을 묻고 싶다'는 일본 쪽의 발언에 대응하는 형태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보고서는 "소녀상은 민간단체 주도로 설치된 만큼 정부가 관여하여 철거하기 어렵다고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쪽은 이를 합의 내용에 포함시켰다"며 "이 때문에 한국 정부가 소녀상을 이전하기로 약속하지 않은 의미가 퇴색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날 외교부의 보고서 공개에 맞춰 여성가족부도 화해·치유재단과 유네스코 등재 추진 사업 중단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재단의 설립과 지원은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1월6일 외교부로부터 전달받은 박 전 대통령 지시 사항에 따라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러면서 일본 측 거출금과는 별도로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인건비와 관리비 등을 운영비조로 부적절하게 지원했다. 통상 민간단체에 경비를 보조할 때에는 보조받는 민간단체가 관련 사업 수행실적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화해·치유재단은 사업 수행실적이 없음에도 국고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예산이 중단된 유네스코 등재 지원사업과 관련해서도 박 전 대통령이 2016년 1월 6일 "유네스코 등재 지원 사업에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관여하지 말고, 추진 과정에서 정부 색을 없애도록 하라"고 지시해 사업 지원을 중단했다.
또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정부와 재단 관계자가 피해자들에게 한·일 합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현금 수령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거나 설득하는 발언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게 여가부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날 향후 재단 운영 방향에 대한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
한편 정치권에서도 위안부 합의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과거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과거 정부의 주고받기 식 협상 과정에서 초래된 왜곡된 외교의 결과"라며 박근혜 정부를 강력 비판했다.
백혜련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TF 보고서를 통해 당시 합의가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박근혜 정부의 밀실 합의였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났다"며 "내용뿐 아니라 절차적인 면에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혜련 대변인은 특히 "정부는 오늘 발표한 보고서 내용,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각, 관련 전문가 단체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서 향후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며, 생존 피해자 서른두 분 할머니들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위해 이 문제만큼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며 정치권의 초당적 대응을 요청했다.
이행자 국민의당 대변인은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재협상에 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혜선 정의당 수석 대변인은 논평에서 "2015년 굴욕적 합의에 대해 문제제기 해왔던 의혹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게 드러났다"며 합의 관련 책임자들 문책을 정부에 촉구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폐기나 재협상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합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바른정당 유의동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며 "갈등의 조장보다는 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라며 정부의 비판을 자제시켰다.
이번 TF 보고서를 토대로 위안부 합의의 처리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곤혹스런 입장이 됐다. 이면 합의가 피해자가 아니라 정부 중심으로 도출됐고 일본 측 요구를 우리 정부가 수용하는 굴욕적 형식과 내용이어서, 합의 파기나 재협상 목소리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아울러 고노 다로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이날 담화를 통해 "(위안부 합의는) 양국 정부 간에 정당한 협상 과정을 거친 것으로, 합의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서 "한국 정부가 합의를 변경하려 한다면 한일관계가 관리 불가능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합의 변경 요구가 있어도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재협상 불가입장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아베 총리의 평창동계올림픽 불참을 선언할 수도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 초 일본 도쿄(東京)를 방문하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이면 합의 노출로 정상 간 '셔틀외교'를 복원하려는 한일 양국의 움직임에는 제동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앞서 2014년 일본 아베 내각이 위안부 제도에 일본군과 관헌이 관여한 사실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를 검증하면서 한일 간 외교 협의 경과를 상세히 공개했을 당시 한국이 크게 반발, 한일 갈등이 증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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